신용회복경험담
늦은 후회 속, 다시 찾은 평온
-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.05.26 16:1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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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도입부: 은퇴 후의 조용한 일상 (약 15%)
저는 올해 62세, 대기업에서 정년퇴직한 후 지금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. 아내와 둘이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, 성인이 된 세 자녀는 각자 삶을 살고 있습니다.
퇴직 당시에는 “이제부터는 여유 있게 살 수 있겠지” 하는 생각이었죠. 퇴직금도 어느 정도 있었고, 큰 빚 없이 살아온 덕분에 마음은 편했습니다. 하지만 인생이 늘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더군요.
2. 전개: 늦게 찾아온 큰 지출, 그 시작은 '믿음'이었다 (약 25%)
막내아들이 연예계 데뷔를 꿈꾸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. “아빠, 마지막으로 한번만 도와줘요. 이게 제 인생의 기회예요.” 그 말에 선뜻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.
오디션 학원, 촬영용 장비, 연습실 대관료, 생활비까지… 처음엔 몇 백만 원이었지만, ‘한 번 더, 한 번만 더’ 하다 보니 어느새 총 3,900만 원의 빚이 쌓여 있었습니다.
처음엔 아내 몰래 제 명의 카드로 돌려막았고, 부족한 돈은 친척에게도 빌렸습니다. 결국 막내의 데뷔는 무산됐고, 저는 카드 연체로 신용불량자가 되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.
“내가 도운 게 잘못이었을까?” 하는 자책이 들면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. 무엇보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말 못하고 끙끙 앓았던 시간이 제일 괴로웠습니다.
3. 위기: 아내의 눈물,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 (약 20%)
결정적인 계기는 아내였습니다. 우연히 제 우편물을 정리하다 카드 연체 통지서를 본 거죠.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“도대체 얼마나 된 거야?” 하고 묻는데, 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.
모든 걸 털어놓고 나니, 아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군요. 그러다 조용히 말했습니다. “이제라도 정리하자. 같이 해결해보자.”
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‘혼자가 아니구나’ 싶었습니다. 그 길로 개인회생이라는 제도를 찾아보게 됐고, 상담을 예약했습니다. 문 앞에서 들어가기까지 30분을 망설였습니다. ‘이 나이에, 이런 데까지 와야 하나’ 싶었지만, 그게 제 인생을 다시 붙드는 첫걸음이었어요.
4. 해결: 법적으로 정리한 마음의 빚 (약 25%)
상담을 통해 개인회생은 단순히 채무를 없애주는 게 아니라, 현실적인 수준에서 갚을 수 있게 조정해주는 제도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. ‘포기’가 아닌 ‘정리’라는 말이 와닿았죠.
수입은 월 190만 원가량 되는 경비원 급여가 전부였고, 그걸 바탕으로 법원에 제출한 변제계획은 월 18만 원씩 3년간 변제하는 내용이었습니다.
상담부터 인가 결정까지는 약 4개월이 걸렸고, 중간에 법원 출석도 했습니다. 판사 앞에서 제 상황을 설명하며 머리를 조아렸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합니다. 다행히 진정성을 인정받아 인가를 받을 수 있었고,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했습니다.
초반엔 서류 준비나 온라인 시스템 사용이 어려워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, 시간이 지나며 하나하나 익혀가고 있습니다. 무엇보다, ‘이제는 갚을 수 있다’는 마음이 생긴 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.
5. 결말: 늦은 배움, 그리고 다시 피는 삶의 꽃 (약 15%)
지금은 개인회생 2년차를 넘기고 있습니다. 매달 날짜 맞춰 변제금을 납부하면서,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기분이 듭니다.
아내와의 관계도 한층 깊어졌고, 자녀들에게도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안부 전화를 할 수 있게 됐어요. 아직도 막내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, 그 아이 역시 “아빠, 너무 죄송하고 고맙다”는 말을 전해왔습니다.
앞으로의 목표는 단순합니다. 남은 변제 기간을 잘 마무리하고, 정년까지는 몸 건강히 일하는 것. 그리고 삶의 마지막까지 평온함을 지키는 겁니다.
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 저처럼 늦은 나이에 빚을 떠안고 계신 분이 있다면, 꼭 전하고 싶습니다. 나이와 상관없이,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. 개인회생은 그 시작을 위한 문입니다. 혼자 끙끙 앓지 말고, 꼭 문을 두드려 보세요. 저처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.